남당이릉

단초(丹草) | 2012.12.17 02:17 | 조회 3658


공동묘지

입구




































남경시 남쪽 고산(高山)에 위치한 열조 이변과 원종(元宗) 이경(李璟) 부자의 능묘인 남당이릉(南唐二陵)
묘호(廟號)는 열조(烈祖), 시호(諡號)는 광문숙무효고황제(光文肅武孝高皇帝)이다.
남당이릉(南唐二陵)은 당송(唐宋)변혁기의 과도적 특색을 증명하는 능묘로, 전란이 잦았던 오대십국시대에 조성된 것으로는 드물게 남아있는 황릉이다. 이미 송대(宋代)에 도굴당했음에도, 열조(烈祖)의 흠릉(欽陵)은 장엄하고 웅장한 기색을 나타내는 반면, 원종(元宗)의 순릉(順陵)은 점차 기울어져 가던 국운을 반영한 탓인지, 흠릉에 비하면 수준이 떨어진다.

남조(南朝)의 첫 번째 황제인 송무제(宋武帝) 유유(劉裕)의 초녕릉(初寧陵)부터, 능원의 지하궁전과 지상건축의 규모가 점차 방대해진다. 비록 능묘의 건축은 오랜세월의 전화(戰火)를 거치면서 사라졌지만, 오늘날 능원 곳곳에 남아있는 석조(石彫)를 보면, 장엄한 감각이 느껴진다. 유송(劉宋)왕조는 모두 8명의 제왕이 나왔는데, 대부분 건강에 묻혔다. 유유의 초녕릉은 비교적 유명하지만, 그러나 나머지 능묘는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의 경녕릉(景寧陵)을 제외하면, 전란으로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제(齊) ・양(梁)의 제왕 11명은 본래 동족(同族)지간으로, 모두 난릉소씨(蘭陵蕭氏) 계열이다. 제 ・양조(齊梁朝)의 황릉 중, 고제(高帝) 소도성(蕭道成)의 태안릉(泰安陵) ・무제(武帝)의 경안릉(景安陵) ・명제(明帝)의 흥안릉(興安陵) ・양무제(梁武帝)의 수릉(修陵) 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진조(陳朝)의 경우, 무제(武帝) 진패선(陳覇先)의 만안릉(萬安陵)과 문제(文帝)의 영안릉(永安陵)이 현존한다.

수(隋)나라는 강남을 정복한 직후, 육조고도(六朝古都)를 철저히 파괴하였다. 당대(唐代)까지도 마냥 방치되었던 금릉이 도시로서의 기능을 부활하게 된 것은 천하가 다시 사분오열된 오대십국(五代十國)에 돌입하면서부터다. 금릉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한 남오(南吳)는 대규모 재건공사에 착수하였으며, 남오의 실력자 서지고(徐知誥, 李昪)가 이곳을 근거지로 남당(南唐)왕조를 창시하게 된다(9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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