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의묘 [ 鄭和 ]

단초(丹草) | 2012.12.17 02:25 | 조회 2917

중국 명나라의 환관 겸 전략가. 정난의 변 때에 공을 세워 연왕이 영락제(永樂帝)로 등극하는데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거대한 남해원정단을 이끌고 동남 아시아에서 아프리카 케냐에 이르는 30여 국에 원정하였다.

윈난성[雲南省:운남성] 쿤양[毘陽:곤양] 출신으로 명나라 성조 영락제 때 시작된 남해(南海) 원정의 총지휘관이다. 큰 키에 체격이 담대하였으며 성격이 활달한 장군이었다. 본래의 성은 마(馬)씨, 본명은 마화(馬和)이다. 법명은 복선(福善). 삼보태감(三保太監 또는 三寶太監)이라 불린다. 그의 국적은 중국이지만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교 집안 출신으로 윈난성(雲南省)의 한 지방 관리였던 마합지(馬哈只)의 아들로 태어났다. 1382년 윈난성이 명나라에 정복되자 명나라 군대에 포로가 되어 끌려왔다. 어린나이에 명나라에 끌려온 후 거세되어 환관이 되었고 연왕(燕王) 을 섬겼다. 20년 동안 환관으로 일하면서 연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최고의 고문관이 되었다. 1399∼1402년 정난(靖難)의 변 때에 연왕을 따라 무공을 세웠으며, 연왕이 조카 혜제에게서 제위를 찬탈하고 황제인 영락제(永樂帝)로 즉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환관의 장관인 태감(太監)에 발탁되었으며, 정(鄭)씨 성을 하사받았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조카 혜제가 죽지 않고 해상에 숨어들었다고 의심한 영락제의 명을 받아 전후 7회에 걸쳐 대선단(大船團)을 지휘하여 동남아시아에서 서남아시아를 거쳐 아프리카 케냐 스와힐리에 이르는 30여 국에 원정하여 수많은 외교사절이 왕래하였고 명나라의 국위를 선양하였다. 중국에서 생산되는 비단과 도자기를 가지고 열대지방의 보석, 동물, 광물 등을 교환하여 중국으로 가져와 무역상의 실리를 획득하였다.


당시 선단의 대선이었던 보선(寶船)의 규모는 길이가 137m, 선폭이 56m이고 9개의 돛대가 달려 있었으며 배수량은 약 2700톤으로 추측된다. 1957년 난징에서 거대 방향 키가 발견됨으로써 정화가 이끈 원정단의 대형선박의 존재가 사실임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1405년 소주를 출발한 제1차 원정 때에는 보선만 62척이었고 장병 2만 7800여 명이 분승하였으며 선단은 총 317척으로 말라카 해협에서 해적들을 물리치고 인도 서안의 캘커타까지 도달하여 진국(鎭國) 비를 건립하였다. 마지막 원정이었던 영락제의 손자 선덕제(宣德帝)때인 1431년, 제7차 원정 때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 들렀으며 아프리카 케냐의 스와힐리 해안까지 항해하였다. 정화 함대의 원정으로 중국인들은 남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으며, 동남아시아 각지에서의 화교(華僑)의 수적인 증가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정화가 지휘한 명나라 세력의 인도양 진출은 1492년 콜럼버스, 1497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양 도달보다 80∼90년이나 앞서는 것이었으나 문신들의 환관에 대한 강력 견제에 부딪혀 원양선이 제거되고 무역이 금지되면서 더이상의 해양개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화는 1433년 마지막 원정을 끝낸 이듬 해에 병으로 사망하였으며 무덤은 난징에 위치하고 있다.

[출처] 두산백과

 












묘앞에 있는 향(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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