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양제 양광릉

단초(丹草) | 2012.12.20 21:25 | 조회 2866

수 양제 양광(隋煬帝 楊廣, 569년: 북주 천화(天和) 4년 ~ 618년: 의녕(義寧) 2년 3월 11일)은 중국 수의 제2대 황제이며, 수 문제 양견의 차남이고, 어머니는 문헌황후 독고씨이다. 본래 묘호는 세조(世祖)이며 시호는 명황제(明皇帝)이나 당(唐)에서 올린 시호인 양제로 불린다. 진 시황제보다도 성격이 더 포악하고 무자비하여 중국의 여러 황제 중 가장 폭군으로 손꼽히는 황제이기도 하다.

중국 수(隋)나라의 제2대 황제(재위 604∼618). 만리장성을 수축하고 대운하를 완성하였다. 3차례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대패하였고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수나라가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이름 양광(楊廣). 연호 대업(大業). 문제(文帝)의 둘째아들. 어머니는 문헌독고황후(文獻獨孤皇后). 시호 양제의 양(煬)은 악랄한 황제를 뜻한다고 한다. 그의 나이 13세에 진왕(晉王)이 되었고 남조(南朝) 진(陳)을 토벌하는 데 크게 활약하였다. 계략에 능하여, 형인 황태자 용(勇)을 살해하였고 스스로 황태자가 되었다(600). 권신인 양소(楊素)와 결탁하여 제위에 올랐는데, 그때 아버지 문제(文帝)를 살해하고 그 비(妃)를 범하였다고도 전한다. 즉위한 뒤에는 만리장성을 수축하였고, 뤄양[洛陽]에 동경(東京)을 조영하였으며, 남북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완성하는 등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자주 벌임으로써 백성에게 과중한 부담을 주었다. 그 자신은 이 대운하에 용주(龍舟)를 띄우고 화려한 순행(巡幸)을 하였지만, 대운하의 개통은 강남의 물자를 북으로 운반하게 하는 등 남북 융합에 크게 공헌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북방에서 강성하던 돌궐(突厥)과 서방의 토욕혼(吐谷渾)을 공략하였으나, 전후 3회에 걸친 고구려 침입에서는 번번히 대패하였다. 612년 제1차 고구려 침공 때는 113만 8천명의 대군을 끌고 침입하였다. 당시 양제의 사위였던 우문사급(宇文士及)의 아버지 우문술(宇文述)이 사령관이었으며 양제도 직접 지휘하였다. 하지만 고구려의 장군 을지문덕(乙支文德)에게 살수(薩水)에서 대패하였다. 613년 제2차 침공 때는 후방에서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이 일어나 철수하였다. 2개월에 걸쳐 겨우 진압하였지만, 이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른바 수나라 말의 반란기에 접어들었다. 614년 다시 고구려 원정에 나서지만 고구려에서 화해를 요청해와 이를 수락하였다. 이러한 3차에 걸친 고구려 원정은 양제가 백성을 과중하게 혹사 시킨 데다 기근 ·수해까지 겹친 것이 원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폭군만은 아니었으며, 대업례(大業禮) ·대업률령(大業律令)의 정비와 대운하의 완성과 같은 큰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만년은 전란을 외면하고 풍치가 아름다운 장두[江都: 揚州]로 옮겨 사치스런 생활을 하다가, 친위대 신하인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해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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