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장의 묘 - 명효릉

단초(丹草) | 2012.12.20 23:49 | 조회 2995

중국 명(明)나라의 초대 황제(재위 1368∼1398).

 

홍건적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각지 군웅들을 굴복시키고 명나라를 세웠다. 동시에 북벌군을 일으켜 원나라를 몽골로 몰아내고 중국의 통일을 완성, 한족(漢族) 왕조를 회복시킴과 아울러 중앙집권적 독재체제의 확립을 꾀하였다.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고, 재위연호(在位年號)에 의해 홍무제(洪武帝)라고도 한다. 호주(濠州:安徽省 鳳陽縣)의 빈농 출신으로, 17세에 고아가 되어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들어가 탁발승(托鉢僧)이 되어 여러곳을 전전하였다. 홍건적(紅巾賊)의 부장 곽자흥(郭子興)의 부하가 되면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곽자흥의 양녀와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다. 곽자흥의 군대가 분열되자 독자적으로 군대를 모아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원(元)나라 강남(江南)의 거점인 난징[南京]을 점령하였다. 이때 그의 병력은 2만명에 달했고 자신을 오국공(吳國公)이라고 호칭했다. 홍건적 군대가 원나라의 공격을 받고 패퇴하고 나머지 남경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진우량과 소주의 장사성의 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여 마침내 각지의 군웅들을 모두 굴복시켰다. 1368년 남경에서 명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홍무(洪武)라 하였다. 동시에 북벌군을 일으켜 원나라를 몽골로 몰아내고 중국의 통일을 완성하였다.

주원장은 한민족(漢民族)의 왕조를 회복시킴과 아울러 모든 몽고 풍속을 금지시키고 중앙집권적 독재체제의 확립을 꾀하였다. 중앙에는 1380년 중서성(中書省)을 폐지하여 육부(六部)를 독립시키고 도찰원(都察院)·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를 설치하여 이들 기관을 황제 직속하에 두었다. 지방에도 포정사사(布政使司:行政)·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軍事)·안찰사사(按察使司:檢察)를 병립(並立)시키고 이들을 중앙에 직결시켜 황제는 이 통치기구 위에 군림하여 절대권력을 장악하였다. 또, 24인의 황자(皇子)를 전국의 요지에 분봉(分封)하여 제실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한편, 농민통치에도 힘을 기울여 전국의 농촌에 이갑제(里甲制)를 설치하고 부역황책(賦役黃冊)과 어린도책(魚鱗圖冊)을 만들도록 하여 조세·부역의 징수를 공평히 하고 정책의 침투를 꾀하였다.

주원장이 실현하고자 했던 군주독재권의 강화는 공포정치에 의해 실현되었는데 특히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그와 동고동락한 측근들 대부분을 숙청하였다. 이때 목숨을 잃은 측근이 2만명에 달했다고 전한다. 이런 비극을 감내했던 이유는 그의 아들에게 보다 확고한 황제의 지휘권을 물려주기 위함이었는데 큰 아들이 급사하는 바람에 손자(건문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었고 왕위 계승자가 아직 어려 숙청작업은 더욱 가혹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주원장이 걱정하였던 황제의 위협세력은 그를 도왔던 개국공신들이 아니라 26명이나 되는 그의 아들이었다. 주원장은 만년에 고독하게 살다 1398년 71세의 나이로 병사하였고 그가 죽은 이후 아들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출처]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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